★
내가 살아온 인생을 적어보려 합니다. ★

보잘
것
없지만
내가
살아온
인생의
흔적을
적어보려
합니다.
나는
남편의
직장이
동두천
내에
주둔해
있는
미
2사단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두천에서
신접살이를
꾸리게
되었다.
8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일년 반 만,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이유는
동두천이
기지촌이다
보니
아이
교육상
서울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8년을
살다
서울에
올라
와
보니
그새
시골
여자가
되어
있었다.
서울에
와서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을
했고,
막내딸은
유치원에
입학을
하였다.
그
중에
막내딸
유치원의
자모가
시골스런
모습이
남아있는
나에게 접근을 해 왔다.
그녀는
나에게
꽃꽂이
강습이
있는데
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그
권유에
나는
자모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어떤
가정에
자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긴
교제상에는
화기와
꽃들이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선생님이
꽃꽂이를
가르쳐주신다고
하였다.
나는
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수업에
한
눈에
반했다.
바로
나도
하겠다고
신청을
하고
그때부터
단
한번도
수업시간을
빠지지
않고
3년을
배웠다.
내가 꽃꽂이를 배운 것은 사범이 되려고 배운 것이 아니라 취미로 배웠던 것인데,
어느
덧
나는
꽃꽂이
사범
자격증까지
받게
되었다.

그동안
안정된
가정으로
돈
구애
안
받고
잘
살아왔었는데
어느
날
청청병력
같은
소리가
남편한테서
들려
왔다.
미군부대가 철수한다는 말이었다.
그
이유는
미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카터가
공약으로
미군
부대를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카터가
당선이
되었다.
만약
그
공약이
실현되면
꼼짝없이
미군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고
,
미군부대
관련 종사자들은 모두다 직업을 읽어버리게 되는 판국이었다.
아직
아이들은
어린데
남편이
직업을
잃게
되면
어떡하나
근심이
태산이었다.
우리한테
위기가
닥쳤구나,
라고
속으로 한탄하였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만 없었다.
나의
엄마는
우리들한테
강한
면이
있다더니,
위기가
닥치니 나한테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꽃꽂이
사범증을
서랍
속에
넣어
두었었는데,
조심스레
그것을
다시
꺼내보았다.
처음에는
걱정된 마음으로 나의 올케들에게 꽃꽂이 하는 방법을 가르쳐줄테니
우리
집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처음이지만,
꽃꽂이하는
방법을
올케들한테
가르쳐
보니까
설명도
생각보다
잘되고
꽃꽂이도
예쁘게
되어서
첫
강연은
성공이였다. 첫 강연이 성공하고 나니까 자신감도 생겼다.
그다음엔
우리
동래
양장점이
있었다.
양장점에
창문에
빈
화기가
놓여
있길래,
내가
꽃꽂이
선생님이라고
알려주며,
양장점
여사장님한테
꽃을
꽂아
주겠다고
말을
했다.
여사장님은
너무
좋아하면서
예쁘게
꽃아주세요
하고
하기에
부탁을
받고
남대문
꽃시장
에
가서
꽃을
한
아름
사다가
화려하게
꽃아
주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
여사장이
동래엄마들을
모아주어
그때부터
꽃꽂이
선생으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그때 한국에 꽃꽂이 붐이 일어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미군이
철수를
안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정희
대통령님께서
미국
카터대통령한테
많은
사정을
말해서 무마되었다고 한다.
그
때를
시작으로
꽃꽂이
선생을
15년
동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술이
조금
취해서
귀가를
했다. 느닷없이 남편은 미군부대 내에 꽃집 낸다 하더라.
미군부대
내에
꽃집을
낸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담당자에게 나를 추천하라고 말해 달라고 하였다.
남편은
나에게 당신이 꽃집을 어떻게 하냐며 말만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일주일
후
남편은
그럼
당신이
해
볼래?
하길래
당장에
내가
해볼
깨요.
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럼
그동안
활동한
기록들을
잘
정리해서 달라고 하였다.
담당자인
미군
장교가
원더풀
외치면서
나를
추천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꽃꽂이
선생을
접고
상업으로
전향을
했다.
분야가
다르니
모든
것이
서투르고
장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무엇보다
손님들이
미군이였기
때문에
첫째는
언어가
문제였고,
둘째는
미국사람들의
취향을
잘
모르겠고,
셋째는
물건의
가격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그것도
어려운
과제였다,
그
외에도
이루
혜
아
릴
수가
없을
정도로
어려움이
있었다.
물건을
팔려고
하니,
언어가
통해야 원하는 물건을 팔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
가슴만
꽁당꽁당
뛰기만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종이를 내놓고 글로 써 달라고 하기 시작했다.
글을
보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말로하면 말이 너무 빨라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었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 상인으로 자질을 갖추는데 몇 개월이 걸렸다.
하다보니
꽃장사가
너무
잘
되서
종업원을
두어도
손이
모자랐다.
이에
남편한테
당신
사업
그만하고
나를
도와달라고
제의를
하였다.
남편은
내
제의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자신의
일에,
아내의
일까지
도와주려니
아무래도
무리가
왔고,
남편은
결국
내
제의를
따라 사업을 접기로 결정을 내렸다.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매일
새벽
6시에
나는
남편과
함께
남대문
꽃시장를
한두바퀴
돌면서
꽃을 차에 실고
상업지인
동두천으로
달려갔다.
그
후
10시전에
들어가서
가게
문을
열고
꽃을
가다듬어
꽃
냉장고에
넣고
나서,
꽃을
꽂아
장사 준비를 해 놓아야 했다.
그렇게
저녁 7시30분까지 일하고 나면, 집에는 저녁 9시나 돼야 도착한다.
일
년에
쉬는
날은 명절 때 4일만 쉬고 일을 계속 하였다.
그렇게
15년
동안
꽃꽂이
전문가
생활을
열심히
일을
하며
보냈다.

그
대가로
첫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전자공학
박사를
취득했고,
현제
삼성
반도체에서
상무로
근무하고
있다.
다른
두
자식도
무사히
대학을
졸업시켰다.
꽃을
팔아
자식들
교육을
무난히
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삼
남매
결혼까지
다
시키고
분가를
시켰다.
남은
건
우리
두
부부였다.
계속해서
먼길
꽃집을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살던중
내
나이
60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불행하게도
갑작스레
찾아온
병이
있었다.
나는
손목이 너무 아파져서 가위질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
보니
의사선생님은
손목수술을
하라고
권하였다.
여기저기
병원를
찾아다니며
검사를
해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내
몸은
전신이
마비가
오고
온
몸은
붓고
통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찾은
병원이
서울
안
암동에
있는
고대병원이었다.
그
병원에서
휠체어를
태워가지고
여러
가지
종합
검사를
하였는데,
검사
결과
그
병은 루마티스 관절염이라 하였다. 그 병에 대해 집중적으로 치료를 하니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발도
디딜
수가
있어
중풍
환자같이
어기적거리며
걷는
것도
할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온
몸이
부드러워지면서
내가
스스로
머리를
감을
수가
있었다.
내가
병마에
시달리는
동안 내 남편이 3년이 지나도록 밥을 지어주었다.
그때
내
나이
63세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폐인이
된
건지,
마음이 슬퍼지고 내 인생의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왔는지~~~
지금
와서
나에게
남는
건
병
뿐이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죽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
이제부터
나를
위해
인생을
살아보자
하고 찾은 것이 실버타운이었다.
첫
번째
찾은
곳이
약수동
실버타운이다.
하지만 공기 더 좋은 곳으로 가길 원했다.
마침
그때,
분당
서울
시니어스
타워가
입주를
작년에
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였다.
바로
달려와
세대를
보니
부부가 살만하게 보였다. 당장에 계약금을 걸고 2004년 5월23일에
입주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남편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
노인들만
사는
곳에
남편은
못
간다고
펄펄
뛰었다.
나는
이곳에
가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남편에
반대를
무릅스고
나는
가야겠다고 주장을 했다.
나중에는
안
가겠다면
따로
살자고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이 남편도 따라 왔다.
환자의
몸으로
입주를
하고보니
여러
회원님들
보기에
부끄럽고
속상했다.
회원님들이
나이도
물으시고
들어온
사유도
물어보시고,
나에 궁금한 게 많으신 것 같았다.
내
나이를
말하니 꽃띠가 왔다고 하시며 그 나이에 왜 이리 빨리 왔냐고 더욱 궁금해 하셨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첫
번째 밥을 편히 먹는 것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당에를
내려
가보니
식당
직원들이
상냥한
목소리로
맛있게
드시라고
인사를
하며 식사를 잘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디서 이렇게 대접을 받겠나 생각하니, 바로 여기가 천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
이틀
살다보니
남편이
하는
말이
이곳이 너무 좋다고 했다. 남편은 남편 친구들한테
매일
자랑하기
바빳다.
남편한테 내 선택이 좋았지 라며 한 마디 해 주었다.
시니어스에서
살면서
여기서
짜여진
스케줄대로
참석하면서
즐거운
나날들을
보냈다.
60세가 되도록 운동도 못해보고 살던 내가 하루하루 운동을 하니 몸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운동도
종목마다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있어서
제대로
코치를
받아
잘
배웠다.
(탁구,
포켓볼,
수영,
헬스,
라인
댄스
등)
나는
탁구와
포켔볼
대회에도
참가하고,
라인댄스
시합에
나가서
상도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래
교실이
있어
내
나이를
잊은
듯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나면
내
몸과
마음이
정화가
된
것
같이
깨끗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컴퓨터도
컴맹이
였
는데
컴퓨터
교육이
있다고
신청을
하라고
하기에
내가
할
수가
있을까
두렵지만 한번 해보자하고 신청을 했다.
컴퓨터를
배운다하니
큰
아들이
컴퓨터와
복사기를
사
보내주었다.
배워
보니
너무나
재미있고
신비스러움에
푹
빠져있었다.
그렇게
배운
컴퓨터로
나의
모든
추억을
시디에
담아
저장해놓았다.
아들과
딸한테
내
컴퓨터
실력을
보여
주었더니
어머니!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라고
극찬을
해
주었다.
컴퓨터를
열심히
배워서
손녀와
손자들한테
이메일도
보냈더니
우리
할머니
멋있다고
친구들한테
자랑도
하였다
한다.
아이들
하고도
이야기할거리가
있어
너무
좋고
아이들에게
답답한
할머니가
되는
것을
면했다.
시니어스
에서
살면서
제일
잘
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컴퓨터와
수영
이다.
수영장에
한번도
가
보지
못한
내가,
여기서는
수영을
자유영과
배영을
배워
매일
수영을
하면서
몸
관리를
잘
하고
있다.
또한
날마다
샤워를
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내가
지병인
루마티스
관절염이
있다보니
아침이면
몸이
뻣뻣해
지는
증상이
있어
날마다
남편이 온 몸을 주물러주어야 일어나서 활동을 할 수 있다. 남편이 없으면 살기가 힘든 몸인데
남편이
곁에서
도와주어
잘
살고
있다.
어르신들은
내가
건강하니
참
좋아
보인다
한다.
나는
내
명이
다
할
때까지
루마티스
관절염
약과
혈압
약은
먹어야한다고
한다.
죽을
수밖에
없던
몸이
이곳에
와서
제
2의
인생을
멋지고
아름답게
건강해진
몸으로
잘
살
수
있는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이곳으로
인도해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의
은혜인
것
같다.
시니어스타워 김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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